
[SF 단편] 메모리 런더링: 뫼비우스의 띠
네오-에덴의 뒷골목, 섹터 4의 지하. 이곳은 기억 세탁소다.
범죄자들의 더러운 기억을 지워주거나, 가난한 자들의 행복한 기억을 헐값에 사들여 부자들의 우울증 치료제로 가공하는 곳. 진은 익숙하게 철문을 밀고 들어갔다. 비릿한 쇠 냄새와 소독약 냄새가 섞인 공기가 폐를 찔렀다.
왔어? 물건은.
카운터에 앉은 노인, 닥터 킴이 고글 너머로 눈을 흘겼다. 진은 대답 없이 품에서 피 묻은 메모리 칩 하나를 꺼내 던졌다. 어제 처리한 갱단 보스의 뇌에서 추출한 것이다. 공포, 분노, 그리고 죽기 직전의 아드레날린. 암시장에서는 꽤 비싸게 팔리는 자극적인 소재다.
S급이네. 이걸로 정산은 됐고. 네가 주문한 건 저기 있다.
닥터 킴이 턱으로 구석의 선반을 가리켰다. 작은 앰플에 담긴 푸른색 액체 데이터.
라벨에는 [Mother_Sequence_04]라고 적혀 있었다.
진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그녀가 킬러 생활을 하는 유일한 이유. 어릴 적 헤어진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복원하는 것. 닥터 킴은 진이 가져오는 타겟들의 기억을 팔아넘기는 대가로, 조각난 그녀의 과거 데이터를 복구해주고 있었다.
진은 떨리는 손으로 앰플을 집어 들었다. 목 뒤의 단자에 꽂자 차가운 전율이 흘렀다.
접속.
시야가 바뀌었다. 따뜻한 오후의 햇살. 낡은 피아노 소리. 부드러운 여자의 손길이 어린 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었다.
진아, 우리 딸. 사랑해.
심장이 조여오는 듯한 그리움. 진은 가상 현실 속에서 어머니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피 냄새 나는 현실을 잊게 만드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10분 뒤. 접속이 끊겼다.
진은 몽롱한 눈으로 현실로 돌아왔다. 닥터 킴이 혀를 차며 말했다.
중독이야, 그거. 가짜라도 그렇게 좋냐.
시끄러워. 다음 타겟이나 줘.
진은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태블릿을 켰다. 하지만 닥터 킴의 표정이 묘했다. 그는 평소와 달리 머뭇거렸다.
이번 의뢰는 좀... 특이해. 타겟은 정보 브로커 야누스. 그가 우리 거래 장부를 해킹했어. 가서 죽이고, 서버 원본을 회수해 와.
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섰다. 브로커 따위는 식은 죽 먹기였다.
두 시간 후. 섹터 9의 오피스텔.
진은 쓰러진 야누스의 시체를 넘어 메인 서버에 접속했다. 보안 코드는 단순했다. 그녀는 익숙하게 장부를 검색했다. 닥터 킴의 거래 내역, 그리고 자신의 고객 파일인 [Project_Orca] 폴더가 눈에 들어왔다.
회수만 하면 끝나는 임무였다. 하지만 호기심이 문제였다. 도대체 내 과거의 어느 부분이 복구되었길래 그렇게 비싼 값을 치러야 했을까.
진은 폴더를 열었다. 수많은 데이터 로그들이 쏟아졌다. 그런데 로그의 형식이 이상했다.
[파일: Mother_Sequence_01] - 원본 소스: Victim #892 (안구 데이터)
[파일: Mother_Sequence_02] - 원본 소스: Victim #904 (촉각 데이터)
[파일: Mother_Sequence_03] - 원본 소스: Victim #1021 (음성 합성)
진의 손이 멈췄다. Victim #892. 그녀가 3개월 전 처리했던 은행 지점장이었다. Victim #1021. 지난달 죽인 오페라 가수였다.
이게... 뭐야.
진은 스크롤을 내렸다. 마지막 파일, 방금 그녀가 지하에서 구매했던 [Mother_Sequence_04]의 로그가 보였다.
[파일: Mother_Sequence_04] - 원본 소스: Victim #1105.
Victim #1105.
어제 죽인 갱단 보스였다. 그가 죽기 직전 딸을 떠올리며 느꼈던 애틋한 감정. 그것이 세탁되고 가공되어,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진에게 판매된 것이었다.
진은 헛구역질이 올라오는 것을 참으며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에 데이터는 없었다. 닥터 킴은 진이 죽여서 가져온 시체들의 기억 중 가장 아름다운 부분만을 오려내어, 가상의 어머니를 조립하고 있었다.
진은 자신이 죽인 사람들의 감정으로 만들어진 가짜 엄마에게 안겨 울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내 손으로 죽인 사람들의...
진은 비틀거리며 서버실을 나왔다. 손에 쥔 태블릿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이걸 당장 닥터 킴에게 가져가 따져야 했다. 그의 머리통을 날려버려야 했다.
하지만 진은 멈춰 섰다.
만약 이 사실을 밝혀내면, 그 따뜻했던 어머니의 품은 영원히 사라진다. 그것이 시체 조각을 기운 누더기라 할지라도, 그 온기마저 없으면 진은 이 차가운 도시에서 버틸 수 없었다.
진은 옥상 난간에 기대어 도시의 네온사인을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살인을 해서 돈을 벌면, 그 돈으로 기억을 산다.
그 기억은 그녀가 죽인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그녀는 자신의 살인을 소비하며 위로받고 있었다.
끝이 없는 고리. 안과 밖이 구별되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
진은 서버에서 복사한 진실의 파일을 삭제 버튼 위로 가져갔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삭제 완료.
그녀는 태블릿을 끄고 뒤돌아섰다. 다시 지하로 내려가야 했다. 다음 살인을 준비해야 했다. 그래야만 엄마를 다시 만날 수 있으니까.
어둠 속에서 범고래 문신이 슬프게 빛났다. 그녀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세탁기 속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