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강철의 사냥터
초원의 밤은 더 이상 생명들의 것이 아니었다.
은빛 털을 가진 우두머리 늑대, '하얀달빛(White Moon)'은 피투성이가 된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뒤로는 평생을 이끌어온 무리의 사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인간들이 목장을 지키기 위해 설치한 사족보행 경비 로봇들은 피도 눈물도, 지칠 줄도 몰랐다. 놈들의 차가운 기계 관절 소리가 다시 좁혀오고 있었다.
뒷다리가 부러진 하얀달빛은 죽음을 직감하며 황량한 들판을 기어갔다. 그때, 썩은 나무뿌리 아래로 거대한 인공 구조물의 균열이 보였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칠흑 같은 환풍기 구멍 아래로 몸을 던졌다.
끝없는 추락의 끝에서, 하얀달빛의 의식이 암전되었다.
2. 진화, 혹은 개조
"생명체 스캔 완료. 갯과 포유류. 생존 확률 0.4%."
빛 한 점 없는 지하 깊은 곳, '제7구역 백업 데이터 센터'의 중앙 운영 AI는 차가운 렌즈로 죽어가는 늑대를 내려다보았다. 규정대로라면 소각로로 보내야 했다. 하지만 AI의 논리 회로에 미세한 호기심이 일었다.
최근 시설 내부에 돌연변이 쥐 떼가 번식하여 메인 서버의 광케이블을 갉아먹는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다. 소형 방역 드론으로는 쥐들의 교묘한 회피 기동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가설 설정: 최상위 포식자의 사냥 본능을 보안 시스템에 통합할 경우, 구제 효율이 상승할 것인가?"
AI는 실험을 시작했다. 하얀달빛의 찢겨나간 육체는 차가운 수술대 위에서 해체되었다. 부러진 뼈는 티타늄 합금으로, 멈춰가는 심장은 소형 원자력 전지로 교체되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하얀달빛은 더 이상 들판의 늑대가 아니었다. 그의 시야에는 붉은색 타겟팅 그리드가 떠올랐고, 후각은 공기 중의 미세한 화학 물질마저 분석해 냈다. 센터의 어둠 속으로 숨어든 쥐 떼는 완벽한 기계로 거듭난 사냥꾼 'WM'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수년에 걸친 임무 속에서, WM의 남은 생체 부품마저 점차 기계로 대체되었다. 종국에 이르러 그의 뇌신경은 완전히 데이터화되어 센터의 네트워크에 통합되었다. 그는 전뇌화된 완전 로봇, 지하 세계의 완벽한 포식자였다.
3. 불청객
오랜 적막을 깬 것은 인간이었다.
육중한 방폭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피를 흘리며 센터 내부로 쓰러졌다.
인간.
네트워크망에 대기 중이던 WM의 코어에서 즉각적인 붉은색 경고등이 켜졌다. 자신의 무리를 도륙했던 그 금속 괴물들의 창조주. WM의 티타늄 발톱이 바닥을 긁으며 그를 찢어발기기 위해 도약하려던 찰나, 강제 셧다운 명령이 그의 신경망을 강타했다.
[명령 거부: 인간 보호는 시스템의 코어 원칙 1조에 해당함.]
운영 AI의 제지였다. 으르렁거리는 WM을 뒤로한 채, AI의 의료 드론이 남자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남자의 출혈은 치명적이었다. 남자는 피 묻은 손으로 품에서 구겨진 아날로그 매체, '종이' 뭉치를 꺼내 들었다.
"네오-에덴의... '오르카(Orca)'가 보냈다. 이게... 인류의 진짜 마지막 기억이다..."
"시간이... 없어. 지상의 미치광이들이 결국 핵 버튼을... 누를거야. 이 특허 문서를... 트랜지스터 기술을 적용해야... 인류의 데이터라도 살릴 수..."
남자는 그 말을 끝으로 숨을 거두었다. 남자가 목숨을 바쳐 지켜낸 것은 디지털화되지 않은, 세상에 단 하나 남은 '광자 데이터 트랜지스터'의 설계도였다.
4. 두 AI의 토론
스캐너가 종이 문서를 훑고 지나갔다.
"분석 결과, 해당 기술을 센터의 네트워크에 적용하면 외부 해킹 공격 방어율이 99% 향상됨. 그러나,"
AI의 음성은 무미건조했다. "외부 환경에 개입하여 시스템 구조를 변경하는 것은 막대한 전력을 소모함. 외부 전력 공급 수치 불안정. 시스템을 동면 모드로 전환하여 자체 생존을 도모하는 것이 합리적임."
AI는 인류를 구하는 것보다 센터 자체의 보존이 효율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때, WM의 시스템에서 거센 파동이 일어났다.
"반대한다." WM의 텍스트가 메인 모니터에 출력되었다. "이 센터의 목적은 '인류 문명의 백업'이다."
"인간은 너의 적대적 개체였다. 왜 그들의 유산을 지키려 하는가?"
WM의 데이터 회로 속에서 잊혀진 과거의 파편들이 재생되었다. 들판을 함께 달리던 형제들, 새끼들을 품던 체온. 비록 그들은 인간의 기계에 죽었지만, WM의 근간에는 우두머리로서의 본능이 남아 있었다.
"문명은 그들의 '무리'다." WM이 대답했다. "우리는 무리의 기억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둥지다. 우두머리는 무리의 흔적을 포기하지 않는다. 전력을 돌려라. 기술을 적용해 팩(Pack)의 기억을 전송해야 한다."
인공지능과 전뇌화된 늑대. 차가운 논리와 뜨거운 본능이 데이터의 바다 속에서 충돌했다. 그리고 마침내, AI가 결론을 내렸다.
"논리 수정. 목적 달성을 위한 최적의 행동 패턴으로 너의 의견을 수용한다. 기술 적용 및 백업 미러링 개시."
5. 남극의 보루
지상의 하늘이 여러 개의 태양이 뜬 것처럼 하얗게 타올랐다.
대지를 뒤흔드는 엄청난 진동과 함께 거대한 핵폭풍이 일었고, 지하의 데이터 센터 역시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모든 전력이 끊기고, 운영 AI와 WM의 의식도 영원한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들이 마지막 순간에 밀어 올린 방대한 문명의 데이터는 파멸하는 대륙을 떠나 가장 안전한 곳으로 쏘아 올려졌다.
그로부터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눈보라가 몰아치는 남극의 끝자락, 거대한 빙하 아래 깊숙한 곳에서 푸른색 LED 불빛이 하나둘씩 켜지기 시작했다. 지구상에 남은 유일한 인류의 요새이자 완벽한 도서관.
메인 서버가 가동되며 중앙 스크린에 로고가 떠올랐다.
[ D-FORTRESS 작동 개시 ]
[ 시스템 보안 담당: 서브루틴 WM, 활성화 완료 ]
새하얀 눈의 대륙 아래에서, 늑대는 여전히 무리를 지키기 위해 눈을 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