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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금요일의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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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의 남자 L씨는 오늘따라 굉장히 멍하고 불쾌한 기분으로 잠에서 깨었다.

주 4일제 근무가 보편화된 요즘, 3일간의 주말 휴일 첫번째 날인 금요일엔 보통 상쾌하고 즐거운 맘으로 느긋하게 깨어난다. 여유롭게 모닝 커피를 한 잔 마시며 3일간을 어떻게 즐겁게 보낼 것인가를 궁리하곤 하였는데, 오늘은 굉장한 숙취에 시달리며 머리가 깨질듯이 아프고 어제 밤의 기억이 하나도 나질 않았다.

분명 목요일의 L씨가 하루 근무를 마치고 스트레스를 푼다는 핑계로 직장 동료들과 우르르 회식에 몰려가 죽어라 술을 잔뜩 퍼마신 것이 분명하였다.

어떻게 귀가를 하였는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진한 블랙 커피를 마시면서 거실의 3차원 홀로그램 디스플레이를 음성으로 작동시킨 후 중요한 뉴스들과 메시지를 읽어 보던 L은 어제의 기억을 더듬어 보기 시작하였다.

 

사실 숙취라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요일별로 세팅되어 있는 몸이 알콜 성분을 전해 받을 리는 없고, 매일 수면 시간마다 그날 하루 동안의 기억들을 동기화하면서 어제의 감정과 기억들을 이어받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제의 기억이 단절되어 있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단서를 찾기 위해 메세지 박스를 열었다. AI 알고리즘에 의해 추천된 주말 여행 상품들이나 맛집, 쇼핑정보 등의 쓸데없는 메시지들을 대충 지워나가던 L은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응당 회사내에서 읽고 처리해야 했을 중요한 업무상 메시지들을 어제 하루동안 열어 보지도 않았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어제 밤의 일만 기억에 없는 것이 아니라 어제 하루 동안의 일이 모두 기억되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서야 가수면 상태로 잠들어 있는 요일별 L씨들의 수면 캡슐을 확인해보니 응당 캡슐 안에 잠들어 있어야할 목요일의 L씨는 사라져 버렸다.

 

'어제 뭔가 몸이 안좋아 병원에 갔었던 것일까?'

수요일까진 몸이 안좋다는 기억이 없으므로 그건 아닌것 같다.

 

뭔가 일이 잘 못 되었음을 안 L은 친한 직장동료 K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 영상 전화를 받지 않던 K는 머리가 새집이 된 부스스한 모습으로 전화를 받았다.

 

"아...L이군...아흠~ 금요일 아침부터 무슨 급한 일이 있다고 전화질이야!"

 

"아침부터 전화해서 미안하네. 어제는 집에 잘 들어갔었나?"

 

"나야 잘 들어갔지. 로봇 대리기사 네비게이션 시스템에 오류가 좀 있어서 길을 좀 헤매긴 했지만... 너야말로 잘 들어갔냐? 무슨 술을 그렇게 마시냐. 몸 생각해서 작작 좀 마셔!"

 

"미안해. 어제 내가 무슨 실수 같은건 안했나? 부장 앞에서 또 말실수라던가..."

 

"야~ 어제 너는 계속 머리 쳐박고 술만 퍼마시더만. 10년 사귄 애인하고 실연한 놈처럼"

 

"그랬었나? 나는 완전 필름이 끊긴것 같다. 어제밤 기억이 하나도 안나~"

 

"허참. 큰일낼 친구로구만. 요즘 같은 세상에 길거기를 그렇게 쏘다니다니... 퍽치기 안 당한게 천만 다행이다!"

 

 

한참 동안의 대화끝에 회사 근처에서 3차까지의 회식을 마친 후 모두 귀가를 하였는데 L씨 혼자 홀로 더 술을 마신다고 근처의 칵테일바로 향했다는 사실을 알아낸 후 K와의 통화를 끝냈다. 타인에 대한 우발적 살인이 횡행하는 요즘 세상에 왜 혼자 길바닥을 쏘다니며 술을 마신건지 목요일의 L이 매우 원망스러웠다.

 

너무 과하게 술을 마신게 분명하다. 어딘가의 길바닥에 정신을 잃은채 쓰러져 있는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만약 몸이 손상되기라도 한다면 가장 지루하고 힘든 요일인 목요일의 역할도 자신이 하게 되는건 아닌지 겁이 덜컥 나기 시작했다.

 

저녁이 되자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주말용 테슬라 전기차를 몰고 금요일의 L은 회사 근처 칵테일바에 가보았다. 목요일의 L을 찾으러...

 

칵테일바의 마담은 오픈하자마자 온 첫손님인 L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어머! 어제는 잘 들어가셨어요? 술이 많이 취하신것 같던데?"

"아.. 네 어제는 죄송했습니다. 지갑을 잃어버린것 같은데 혹시 여기 놔두고 갔나 해서요"

"그럼 택시안었을거에요. 어제 몸도 못가눌 정도로 취하셔셔 제가 택시를 호출해 집에 보내드렸거든요"

 

'어라... 집에 갔단 말인가?'

 

뭔가 작은 단서라도 찾기 위해 귀가길의 경로를 샅샅이 둘러보았다.

 

'가만...저건?'

귀가 길의 한 중간에 있는 제 15 한강교 위에서 가지런히 놓여있는 낯익은 구두 한 켤레를 발견하고, 비상 정차등을 켠후 차를 멈처 세웠다. 분명 목요일 출근할 때 신는 L의 구두였다. 까마득히 내려다 보이는 한강물은 다리의 그늘 때문인지 시퍼렇다 못해 음침한 분위기였다. 망연자실히 서서 한참 한강변을 내려다보던 L은 낡은 구두 한 켤레를 품에 품고 집으로 천천히 돌아왔다.

 

맥주를 두 캔이나 먹었지만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다음주부터 목요일의 역할도 자신이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일주일에 두번이나 깨어나야 한다니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도 가장 스트레스가 심한 목요일의 역할을 해야 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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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실팬가..."

"네, 그렇습니다. 같은 패턴의 오류가 세번째나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지도 교수는 이 모든 사태의 책임이 박사 과정 졸업 논문 주제를 잘못 선택한 조교의 잘못이라는듯 싸늘하게 조교를 쳐다보고 있었다.

 

"다음 주 까지 오류 해결방안을 찾아봐"

 

한 마디만을 차갑게 내뱉은 지도 교수는 쌩하니 찬바람을 일으키며 나가버렸다.

 

인지전산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조교도 곤혹스러울 뿐이었다. "복제 인간을 이용한 사회적 책임 분담과 기억 동기화"란 주제를 박사 논문 주제로 채택한 그는 자꾸 실패가 거듭되는 것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괜히 너무 거창한 주제를 선택한것 같았다.

 

인간 복제 기술이 보편화된 현재에서 기억의 동기화는 상당히 각광을 받는 분야이기 때문에 선택한 주제였다. 복제 몸체를 이용하여 매일 출근하여 받는 스트레스를 분담하는 세상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몸을 복제하여 요일별로 각각의 개체들이 생활하고, 수면 시간에 뇌파를 이용한 단기 기억 동기화 프로그램을 통해 전날의 기억을 이어받는 실험에서 기억과 감정의 이전은 그럭저럭 만족할만한 수준으로 작동되었다.

 

하지만, 목요일의 역할을 수행하는 몸체가 반복되는 문제를 일으켰다. 거듭되어 축적되는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여 항상 실험 도중 자살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러다 이번 학기에도 졸업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연구비야 국가에서 대준다지만...학기당 1억원에 육박하는 대학원 학비를 마련하는 것이 큰 걱정이었다. 자신의 부모님들은 남들처럼 시골에 친환경 유기농 자동 농장을 운영하는 부자도 아닌 평범한 도시의 샐러리맨 의사셨기 때문이다.

이번 학기에도 꼼짝없이 학자금 대출을 신청해야할 것 같다.

 

(2009년 5월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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